환영과 동영상과 영의 존재 및 그 능력
아래의 내용이 무속신앙이나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 등 특정한 종교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내가 어릴 때 내 경험이나 체험으로, 또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초능력이라고 생각을 하거나 무엇이라고 말을 하고 싶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이다.
위의 사진의 이미지가 그 당시 스님과 같이 머리를 박박 깎은 사람이 부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물었을 때 보여준 영상과 비슷하다. 단지, 사진 안의 모습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둘러 있고 그 사진 안의 사람들이 마치 지금의 동영상처럼 개개인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래서 몇 명인지 헤아려 보니 열 명인가 열 두 명인가 정도 되었고 그런 무리들이 한 무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처님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오래 전 그 지역에는 이곳저곳에 많이 있어서 동영상과 같이 보이는 영상이 그 수가 점점 늘어났었다는 것이 그 차이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 스님이 부처님이라고 알고 있는 존재는 내가 내 머리 위에, 그 때는 내가 나의 고향집 마루에 걸터앉아 있을 때이니 내 고향 하늘 위에, 있는 스스로 존재 하는 존재가, 즉 영의 존재가, 즉 신의 존재가, 즉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가, 있는 곳에는 없고 스님과 같은 사람 중 한 사람을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혼과, 스스로 존재 하는 존재는, 즉 영의 존재는, 즉 신의 존재는, 즉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고 정확하게 표현을 하기는 힘들지만 나는 그 중간 정도에 있는, 즉 달리 말을 하면 두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것이고 등의 말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기존에 알고 있는 종교나 신의 개념을 벗어나서 내 머리 위에, 고향의 하늘에, 있는 스스로 존재 하는 존재를, 즉 영의 존재를, 즉 신의 존재를, 즉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를, 이해를 할 수 있게끔 설명을 하려고 하니 어린 나이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모르고 세상 물정을 모르고 특히 관습적인 사고방식 등을 모르니, 특히 나이가 어리니 새겨듣고 이해를 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무시하고 자신들의 편의대로 해석을 하려고 하기에, 설명을 하기가 힘들고 또 귀찮기도 하니 각자가 알고 있는 대로 아는 것이 편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과 더불어 나중에 나의 나이 마흔 정도가 되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니 그 때 내가 무엇을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게 되면 그 당시에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과 내가 말을 하려고 한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란 말도 하고 어느 경우에나, 즉 나의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내가 말을 하고자 하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덜 벗어나려고 하면, 나쁜 짓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하지 않아야 된다고 말을 하면서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것도 일종의 그런 것에 포함이 된다는 말도 한다. 다른 예로서 그 당시 몇몇 사람들이 ‘찬 물’이니 ‘송충이’니 ‘관습’이니 하는 등등의 말들로 내가 그 당시 한 두 마디 하는 말들과 관련하여 알게 모르게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스스로 존재 하는 존재가, 즉 영의 존재가, 즉 신의 존재가, 내 머리 위에, 고향의 하늘에, 있다는 말과 관련하여 누군가가 키가 큰 사람이 내 뒤에서 서서 마치 자신들이 그런 존재인 것처럼 하는 것 등도 그런 것에 포함이 되는 것이란 말도 한다.
‘나쁜 짓’에 대해서 또 묻기에 이것저것 복잡하지만 그 당시 나의 나이나 상태에서는 내가 사람 사는 사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즉 말로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으니 내 머리 위에, 고향의 하늘에, 있는 스스로 존재 하는 존재를, 즉 영의 존재를, 즉 신의 존재를, 말로서 설명을 하기가 힘들 듯이 말로 표현을 하기가 힘들고 대체로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않으면 사람이 행동을 할 때 알 수 있을 것이란 말도 한다. 그래서 무엇인가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어릴 때 대화의 방법 중의 하나로서 즐겨 쓰던 것이 대체로 상대방 보고 먼저 말을 하면 그 중에서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말을 하겠다는 방식으로 대화를 하기도 했는데 그런 태도가 어린 나이에 무례한 것으로 인식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또 그 말들이 어떻게 이해가 되었을까? 2001년 8월 그 날에도 들려 왔듯이 전후 사정 모조리 생략을 하고 ‘나쁜 짓’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하지 말고 ‘각자가 알고 있는 대로 아는 것이 편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만 가지고 어떻게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었을까? 누구를 탓할 것도 아니고 단지 우리 사회의 시대상이고 관습이지만 이렇게 저렇게 왜곡과 굴곡이 그것도 정치적인 요소들과 결합이 되어서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과거 2002나 지금 2007과 관련하여 언론에 등장하고 있는 사람들도 나의 가족들이나 나의 친척들이나 나의 학창 시절 및 나의 군 복무 시절을 돌이켜 보면 몇몇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이러니가 아니라 사람 사는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 무엇이 사람과 사람의 삶이고 무엇이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고 무엇이 정치인가 하는 것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20070131. 정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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