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빡빡 깎은 스님과 마루에서의 일
이미 여러 사람들로부터 내 스스로 시달림 아닌 시달림을 당한 후의 일이다. 즉 상황이 어떠하든 어린 아이로서 대화를 해야 할 상대인 어른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내 스스로 시달림 아닌 시달림을 당한 후의 일이다.
다른 글에서 언급을 했듯이 약 3-40년 전 그 당시 시골 사람들이 신(GOD;SPIRIT)의 존재와 종교와 예언과 사람과 사람의 영혼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이 어떠했던 간에 부처님의 존재가 내가 말을 하는 하늘에 있다고 하는 존재의 세계에 있는지? 부처님이 어떤 존재인지? 하는 것과 관련하여 대화를 하는 도중, ‘존대말’이란 말이 나왔다. 내가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는 존대 말을 써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존대 말이 무엇인지 묻는다. 누가 존재 말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존대 말을 써야 하는지 묻는다. 나이란 것이 있단다. 그래서 나이란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존대말’이나 ‘나이’ 두 단어 모두 설명을 들어도 피상적으로 이해를 하지만, 즉 이론적으로 또는 논리상으로 이해를 하지만, 실질적인 존중이나 시간의 개념이 형성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흐리고 시간이 경과를 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몇이냐고 묻고, 나이가 얼마 정도의 차이가 나면 ‘존대말’을 써야 하는가도 묻고, 더불어 상대방의 대답 후 나의 나이가 얼마인지 아는가 하는 질문을 반문으로 하고 그 과정 중에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느냐는 말도 한다. 상대방으로부터 상대방이 오면 누가 그렇게 말이나 행동을 하라고 가르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기에 ‘존재말과 나이’에 대한 상대방 말대로라면 사람 사는 사회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말’을 사용 하는 것을 가르치지 내가 말을 하는 것을 누가 말을 하겠는냐는 말도 한다. 그 과정 중에 나의 분노 아닌 분노의 표출이, 즉 나를 통한 내 안의 나의 분노의 표출이, 상대방에게는 어떻게 이해가 되고 전달이 되었을까? 그 때의 당황하는 표정으로 보아서는 내가 사람을, 특히 어른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를 하지 못해서 곤란을 겪고 있었던 것처럼 상당한 오해가 있었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또 다른 사람과의 대화 내용이 아닐까 싶다. 부처님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여 부처님이 무엇인지 묻는다. 조상의 넋이란 말도 많이 사용을 하여 조상의 넋이 무엇인지도 묻는다. 무엇을 부처님이라고 알고 있는지도 묻는다. 그래서 내가 나이가 어려서 설명을 하기기 힘들면 무엇을 부처님이라고 알고 있는지 머리 속에 그려 보라는 말도 한다.
아마도 또 다른 사람과의 대화 내용이 아닐까 싶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부처님이 오래 전 먼 곳에 살았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즉 믿거나 말거나 내가 알고 있는 그 당시 나의 고향의 고향 하늘에, 나의 고향집의 마당 위의 하늘에, 있는 늘 존재하고 있는 존재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나와 대화를 할 당시 부처님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알게 된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알게 된 사실을 말을 하고 있으면서 왜 말 끝마다 부처님이란 말을 사용하는지 묻는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웃다가 잠시 할 말을 잊는다.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다른 경우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도 성경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 능력도 받았고, 또 그리스도 예수님이 비록 하나님(여호와님, 야훼님)의 세계에서 보내진 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여호와님, 야훼님)에 대해서 영의 본질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계시고 더불어 기적들로 스스로의 말씀의 진실성을 증거를 하고 계시고 또 사람들의 언행의 지침으로는 십계명을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제사장님들 및 서기관님들과 그리스도 예수님이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본질과 영의 본질과 성경의 본질과 계명의 본질에 대한 교리적 논쟁에 있었던 약 2,000년 전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전도 과정 중 하나님 보다는 성경 보다는 계명 보다는 왜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말씀들을 하시게 되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나 영의 본질이나 성경이나 계명이란 말 대신에 꼭 ‘그리스도 예수님’이란 말을 사용해서, 즉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을 드높여서, 전도를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며, 무엇을 증거를 하라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
다른 대화 내용은 다른 글에서 언급이 되어 있을 것이고 나의 경우가 어떠하던 그리고 실제로 상대방이, 또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인식을 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고 그런 사실이 나의 고향 사람들 전체가 나를 상대로 재미로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 것이 내가 나의 고향 사람들 및 외지 사람들과 내 나름대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대화를 하는 과정 중 실제로 확인이 되었으니 사람 사는 사회에서의 일로서 상대방에게 사과를 한 후, 그러나 그 과정에서 드러난 나의 절망감이나 좌절감이 상대방이 그 당시까지의 나의 경험에 비추면 상당히 총명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나의 말을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하고 전혀 다르게 이해를 하고 인식을 하게 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절망감이나 좌절감이었는데 마치 내가 상대방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 자체에 분노를 하게 되는 것으로 또 잠시 오해를 하기도 했지만 여하튼,
(그 때 내가 상대방에게 선문 선답으로 던진 말은 무엇이며 또 상대방과 관련이 없이 단지 내가 해야 할 일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내 스스로 독백을 하듯이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타고난 스님들의 그것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 말들 중의 하나이기도 할 것인 나의 말들은 무엇일까?, 그 날의 상대방과의 대화로 인하여 담 너머에서 나와 상대방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향 사람이 그 때까지의 나의 발언들과 행위에 대해서 일말의 오해가 있었던 것이 완전히 풀리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표현을 하는 것으로서 말을 하는 것 외의 것에 대한 질문에 글을 쓰는 것이나 영화나 그림이나 만화(만화는 글을 쓰는 것과 거의 같은 것으로 간주를 하는 말도 있었음) 등등이 있는데 나의 그 동안의 말을 고려를 하면 글을 쓰는 것과 영화나 만화가 더 어울릴 것이란 말을 듣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함),
친절하게도 혹시나 제가 예의에 어긋나 보이거나 저의 언행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가시는 길에 나의 고향의 마을 앞에 있는 학교에 가시면 상대방과 비슷한 사람이 있으니 같이 대화를 하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란 말도 해준다. 두 분이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를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란 말도 해주고 덤으로 저를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것이란 말도 해준다. 말 그대로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말도 한다.
한 사람은 유교라는 것을, 아마도 제사나 차례를 통해서 부모님이나 조상님을 말을 하고 섬기는 것을, 다른 한 사람은 불교를, 아마도 부처님을 말을 하고 섬기는 것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단지 이 사람이냐 저 사람이냐 또는 우리 나라 사람이냐 아니면 누군지도 모르는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외국 사람이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래서 나의 관점에서 보면 두 경우 모두 사람에 대한 말이니 동일한 경우에 불과한 것이지만 나의 고향의 사람들의 관점에서 말을 하자면 같은 사람이지만 자신들의 부모나 조상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유교가 맞고 또 불교의 원래 행위인 수도와 깨달음과 득도란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나의 고향 사람들 누구에게나 해당이 될 수 있으니 불교도 맞는데 더 중요한 것은 두 경우 모두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고 잘못 행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비록 표현상 아주 미숙한 것이었지만 나의 경험 및 체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들과 여러 사람들과 세상 및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대화를 하는 과정 중 부모님과 조상님을 알고 말을 하는 것에 대한 것은 자서전 및 그와 유사한 것을 말을 하게 되었었고 그리고 불교는 사람으로서의 학문이나 철학과 같은 수도 행위와 그 결과를 말이나 글로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게 되었었고 신앙의 행위로서는 내가 말을 하고자 하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즉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 즉 최초의 나의 어릴 때부터 발생하게 될 것을 또는 내가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을 내가 글로서 나타내게 되면 성경(The Bible)과 유사할 것이라고 했으니 성경(The Bible)이 맞는다는 것을 말을 한 것이었으며 그 당시 다른 지역에 교회(카톨릭)가 있었으나 책(성경;The Bible)은 맞는데 그 행위 자체가 유교나 불교와 비슷하게 나타난 것 같은지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말도 있었고 그런 말은 내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즉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로부터, 들을 수 있는 것에 의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비록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사람들 중에서도, 몇 천 만 명이나 되는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서도, 그 정도 지각이 있는 사람도 비록 3-40년 전이지만 분명히 있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의 나이 마흔이 되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글로서 나타낼 것이니 그 때 말을 다시 말을 하자는 말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상황에서, 어린 아이를 두고서, 그것도 나의 머리 위에 나의 고향 하늘에 또는 공간이나 거리 개념을 떠나서 이동이 자유로워 늘 가까이 존재를 하고 있어서 매일 같이 경험과 체험을 하고 있으나 그리고 비록 나의 경우에는 텔레파시나 환영이나 느낌이나 촉감을 통해서 인지가 되고 또 교통도 이루어지지만 사람의 인지 능력의 관점에서 볼 때 invisible, inaudible, intangible, above-time-and-space, immortal 등등의 존재의 본질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니 스스로의 답답함을 넘어서 때때로 절망감이나 무기력감에 빠지기도 하는 어린 아이를 두고서, 더구나 유교든 불교든 도교든 상대방은 사람의 언어로 나름대로 표현을 하고 있지만 나의 경우는 어리니 언어 자체를 아는 것에 한계가 있고 그리고 비록 작은 사전과 성경에 있는 정보를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즉 영의 존재, 즉 신의 존재, 즉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존재에, 의해서 두뇌로 옮길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으로서의 영혼과 무엇보다도 태아로부터 출생과 아이와 청소년의 시기를 거쳐 성인으로서의 성장과 노인으로서의 쇠함이 있는 육체가 있으니 언어를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도 이미 유교나 불교와 같이 전혀 다른 개념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를 하고 알 수 있게 표현을 하는 것에 한계가 있어서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을 하고 있지 못하는 그래서 상대방에게 말을 하면 그 중에서 맞는 말을 찾을 것이니 먼저 말을 해보라고 하거나 나의 의사를 표현해 줄 사람을 찾아 마을 어귀나 마을 회관 앞에 가보거나 하는 등등의 언행을 하는 어린 아이를 두고서, 내가 말을 못하는 것 자체가 내가 말을 하고자 하는 존재가 존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었다.
몇몇 외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어른들로서의 앞선 선행지식들을 바탕으로 한 계속되는 질문을 하여 그에 대한 어린 나의 답변에 따라서 내가 말을 하고자 하는 존재의 진실성이나 여타 종교에 대한 말이나 나의 지적 수준을 판단을 하고자 하기에 내가 나의 고향에 있는 것들 중에서 또는 나의 고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중에서 내가 알 수 있거나 이해를 할 수 있거나 특히 말로서 정확하게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나의 질문에 누군지 모를 상대방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을까? 그래서 누군지 모를 상대방이 나이 어릴 때 아는 것과 지금 나에게 말을 할 때 아는 것이 같은가 하는 것을 물으니 누군지 모를 상대방은 무엇이라고 또 대답을 했을까? 특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표현을 하고자 하는 것에서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질문에 누군지 모를 상대방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을까? 어릴 때 세상을 보는 시각과 어른이 되어서 세상을 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다는 말에 어릴 때 누군가로부터 맞은 것은 맞은 것이 아니고 어른이 되어서 맞은 것만 맞은 것인가라는 나의 질문에 누군지 모를 상대방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을까? 사람의 경험이나 체험과 앎과 언어와 표현과 나이나 세월에 대한 것을 말을 하고자 하는 나의 앞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지금도 하루에 차가 2-3대가 다니는 시골에서,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살고 있는 어린 아이의 지식의 수준이나 양으로 사람의 말과 사람의 자질을 판단을 하고자 하는 누군지 모를 상대방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을까?
상대방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똑똑하다.’는 의미의 ‘똑똑’이란 말을 사용을 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심한 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인데 어른들에 대한 어린 아이의 그런 태도를 마치 마귀나 악귀가 들린 것처럼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사고 방식이 폐습적인 관습에 , 특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폐습적인 관습에, 의해서 갇혀 있었는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철없는 나의 생각로만 간주가 되었었지 않는가 싶다. 특히 외지인들에 의해서.
앞에서 유교나 불교나 제 방향대로, 올바르게, 실천이 되게 되면 나의 고향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표현한 것을 바탕으로 아마도 달리 생각을 하게 된 사람들도 분명히, 외지에서 온 사람들 중에서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찬물파나 송충이파를 내가 자주 언급을 하니 마치 내가 좋아하는 관습이나 제도인 것처럼 말들을 만들었듯이 그런 이해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다른 일례로서 내가 말을 하고자 하는 바와 관련하여 비록 약 3-40년 전의 우리 사회이지만 우리 사회의 고유의 신앙이나 종교나 신의 개념과 관련하여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이미 나의 고향 사람들을 통해서 이미 일정 정도는 확인이 된 것이지만, 그리고 앞에서 언급을 했듯이 서양에서 들어왔다고 하는 종교(카톨릭)도 그 종교에서 사용하는 책은(성경, The Bible)은 맞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외형적인 모습에서는 일정 정도 내가 말을 하는 것과 맞지가 않는 것 같은데 무엇보도다 내가 나의 아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을 할 수 없으니 또한 서양의 종교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을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나의 나이가 마흔이 되어서 내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앞에서 언급된 유교나 불교의 경우 외에 우리 사회의 신앙이나 종교 중에서, 즉 조선시대로부터 전래되어 온 것이면 우리 것이고 지금 현재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지 등등 우리 것을 무엇을 우리 것이라고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는 안중에도 없고 우리 것 중에서, 혹시나 일치를 하는 것이 있는가를 찾는다는 누군가의 일의 도모에 의해서 이런 저런 경우를 보게 되지만 순수한 의도보다는 그런 사실이나 또는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던진 말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주고 받게 되는 한 두 마디 말들이 전혀 다르게 이용이 되게 된 것도, 즉 다른 누군가를 위한 예언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당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도 그래서 표적이 되는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만들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이런 저런 기획을 하고 계획을 하는 것도 더구나 그런 불법적이고 반인륜적인 기획이나 계획이 여러 곳들에 의해서 지원이 되고 후원이 되는 것도 등등, 앞의 찬물파나 송충이파의 개념과 일정 정도는 연관이 있는 사실이 아닐까 싶으며 비록 그곳이 어느 사회이든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을 하는 방식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01년 8월 그 날 다른 공간으로부터 들려 왔듯이 나를 무당이나 무속신앙이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즉 초·중·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동기나 선후배 간의 농담섞인 장난의 말이지만 신(God;Spirit)에 대한 개념이나 사람과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개념에 따라서 특히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사람의 한계에 대한 개념에 따라서 농담조의 말을 하기도 했듯이 내가 학창시절 및 여타 사회 활동 시기에 말을 한 것은 다른 사람이 말을 한 것으로 유언비어를 만들고 나를 무당이나 무속신앙이란 말을 만들고자 말을 한 것처럼, 비록 2001년 8월 그 날의 말이 텔레파시나 영의 존재가, 즉 신의 존재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빈말이나 그냥 그 날만의 말이라고 말을 하더라도 일정 정도는 몇몇 사람들의 의식이나 실제로 나를 두고서 약 20년에 걸쳐서, 길게는 약 3-40년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떤 일들이었는가를 추정케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그리고 시골의 이야기이겠지만, 한 고을에서 그 고을의 지주 격이 아닌 사람에게서 뛰어난 사람이 태어나면 자신을 적당한 정도로 숨기고 살거나 다른 곳으로 가서 살게 되는 것도 비록 그곳이 어느 사회이든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나 일을 하는 방식이 얼마나 왜곡되고 뒤틀린 것인가를 일정 정도 반영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재의 우리 사회는 그 만큼 많이 열리고 투명해져가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단순히 개인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느 누구나 사회적으로 얼마나 인정을 받고 유행을 타는가를 떠나서 각각의 재능은 있는 것이고 그 재능을 바탕으로 누구나 동등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살 권리는 각각이 타고난 천부의 권리인 만큼 그런 것이 유지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가 그 만큼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위에서 언급된 분이 수도 생활을 하시는 도중 십 수 년 동안 면벽 생활을 하셨다면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까? 나에 의해서 그리고 나의 고향 하늘에 계신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에 의해서 총명하신 것으로 인정이 된 그 분이 일평생을 수도를 하더라도 오를 수 있을 지도 모르는, 또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지경이나 경지에, 즉 내가 그 날 그 분과의 대화 후 내가 말을 하고자 하는 내 고향 하늘에 계신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와 사람과의 차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을 해주고자 하는 뜻에서 그리고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와 부처님과의 차이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말을 해주고자 하는 뜻에서 언급을 한, 지경이나 경지에 도달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나의 고향 하늘에 계신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에 의하면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를, 즉 영의 존재를, 즉 신의 존재를,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 하기 위한 것으로서 사람과의 관계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듯이 최소한 심령을 다한 기도에 대한 응답과 같은 지경이나 경지에 도달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100 퍼센트 장담을 하실 수는 없지만 기회가 되면 먼 훗날 십 수 년 동안 수도를 해 보실 것이라고 그 분이 그 날 나에게 그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또 이렇게 언급을 하게 된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것도 하나의 일상이거나 무관심이거나 또는 이해관계에 의해서 부정이 될 만큼 삶이 각박하고 혼란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절이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질문명이나 과학의 발달 그 자체보다도 물질문명이나 과학의 발달이 주는 문명의 이기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시절에, 즉 여호와님(야훼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시공을 오초월하여 invisible inaudible intangible 등등의 영의 존재인 관계로 사람의 언어로 남겨진 말씀 외에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시절에 지상의 또는 우주 만물의 형상이 우상이 되어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미혹하고 유혹하여 혼미하게 할 것을 우려한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문명의 이기에 빼앗겨 버린 시절이니, 눈앞의 화려함이나 감각적 자극이 없으면 모든 것이 시시하게 여겨져서 앞의 사실들이 무관심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지만 또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니 이렇게 언급을 하게 된다. - TEN Production 영화 시나리오 작성 중 -
2007년 2월 19일
정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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