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브라이즘 및 헬레니즘과 기독교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 또는 신학적인 해석이나 접근을 잘 모르겠지만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서 선택한 사람을 인류의 언어적 표현으로는 유태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도 과거에는 그렇게 큰 문제가 없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서 특정한 지역의 사람만을 선택을 한 것은 아니고 비록 특정한 지역에만 국한 되게 사람을 선택을 한 것도 아니지만 대체로 최초에 창조된 및 선택된 사람이 거주한, 즉 유태인 중심의, 지역을 중심으로 그 흐름과 그 기록이 이어져 왔을 것이니 과거에는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와 인류의 관계에 대해서 지역 및 민족의 개념과 결합이 된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도 그렇게 문제가 없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종교를 비롯한 사람의 각종 언행이 지역 및 민족 및 국가 등과 지나치게 강하게 결부된 면이 있고 이런 면이 지역과 지역 사람과 사람간의 파벌을 만드는 것에 이용이 되고 있지만 개인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 내부적인 모습이나 대외 관계에서 볼 때 오래 동안 외부와의 단절된 모습에, 즉 사람과 사람으로서 서로 열린 모습이 단절 된 것에, 기인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서 유태인을 선택을 했다고 해서, 또는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서 선택한 사람을 유태인이라고 말을 한다고 해서, 인류의 구원 자체가 민족이나 지역이나 국가나 인종에 의해서 국한 된 것은 아니란 것이고 굳이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와 이 세상의 인류와의 관계에 대한 수 천 년에 걸친 기록인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지 않고 우주가 창조된 것이라는 말 자체만 보더라도 그리고 인류 및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 및 인류의 사후 영혼의 세계를 위한 구원이란 말을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서 선택한 사람은 인류의 구원에 대한 말을 전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서 대한 막연한 인정이나 인지만 존재를 하지 실질적인 경험이나 체험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서 여러 가지의 능력들이나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한 가지 더 주의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성경 및 성경 속의 십계명 및 특히 그리스도 예수님 탄생 이전의 제사장님과 서기관 등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행하는 사람들의 가르침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과거 선지자님의 능력이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 선지자님의 능력이나 모습을 통한 기록들이, 즉 성경의 내용들이, 과거 선지자님과 같이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와의 지속적인 동행이나 교통이나 대화가 없이 몇몇 기도에 대한 응답이나 예언적인 사실로의 응답만 가능한 사람들에 의해서, 즉 제사장님이나 서기관과 같은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과 말로서만 그리고 사람의 온갖 언행에 대해서 죄와 심판이란 잣대로 만든 규율과 규율로서만 전해지다 보니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서 말을 하고자 한 인류의 구원과 관련된 실질적인, 본질적인, 사람의 신앙의 행위나 모습은 없어지고 사람의 신앙의 행위나 모습이 단지 사람과 사람에 의한 말과 말로만 규율과 규율만 존재를 하게 된 것과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사람의 그런 신앙의 행위와 모습에 반해서 살아 있는 신앙, 즉 사람의 삶과 연관이 된 신앙, 즉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가 존재를 한다는 것이고 이 세상 및 육체와 영혼이 결합이 된 사람이 존재를 하듯이 사람의 형상을 한 사람의 영혼의 세계가 존재를 한다는 것이고 그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과 신앙을 바탕으로 십계명 안에서 살아 있는 삶을 사는 신앙, 즉 창조적인 주체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사는 신앙에, 대해서 말을 한 것이 약 2,000년 당시 제사장님이나 서기관 및 몇몇 신앙인들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의 신앙의 행위와 모습에 대한 관점의 차이라고 하면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와의 교통이나 대화나 동행 등과 더불어 신앙이나 믿음에 있어서 동일한 선상에 있지만 단지 사람의 모습이 언행으로 대변이 되니 사람으로서 취할 수 있는 행위로서 규범이나 규정의 틀에 맞추어 사는 것이냐 아니면 변화 무쌍한 현실과 사람의 삶 속에서, 특히 창조적인 삶의 주체로서 무변 다양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실질적인 내용이냐의 차이와 같이 선비 사상을 비롯하여 사람의 모습 중 정신 영역에 대한 지향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도 격식이나 내용이냐의 논쟁을 통해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에 대한 내용을 학문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접근을 할 때 역사적으로 어떻게 분류를 하는지 몰라도 그와 같은 분류가 과거 종파간 논쟁을 비롯하여 과거 마녀 사냥과 같은 현실을 때때로 낳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근래의 우리 사회에서도 교파 간 각각의 중심적인 신앙의 모습대로 신앙 생활을 하기 보다는 교파 간 알력과 대립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일부 마찬가지의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는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가질 수 없는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와의 교통과 대화와 동행에 대해서 선지자님들을, 물론 성모 마리아님과 요셉님과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통한 사실들 및 그 증거들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직감적으로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 대한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사람의 인지 능력의 관점으로 또한 실질적인 역사적인 현실의 사실로서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의 존재함을 알고 믿고 그에 따라 이 세상에서의 삶과 사람의 사후를 위해서 십계명에 따라, 또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약 2,000년 전 당시에도 그리스도 예수님과 동행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삶의 지침으로 필요한 것을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물었을 때 십계명을 말씀을 하신 것도,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활동 중 각종 언행이나 능력이나 기적 등이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와의 교통과 대화와 동행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물론 다른 선지자님의 모습도 마찬가지이지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동일한 사실을 두고서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된 것이 실질적으로 사람의 한계 및 인류의 역사적인 한계에 의한 것이지 성경의 내용이나 성경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전래된 몇몇 종교들에 대해서 지역, 민족, 국가 및 사람의 개념을 강하게 결부를 하듯이 과거 성경과 관련된 사실들도 유태인 사회란 지역과 결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또는 과거 성경과 관련된 사실들도 우주를 창조하신 신 및 신의 세계와 교통이나 대화나 동행이 이루어졌던 사람의 지역과 결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만큼 인류의 삶이 지역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인류의 과학적 미개에 의해서 학문적 교류가 막혀 있었고 통신 문명이 근래와 같지 못한 것에 기인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론적 모습 중에서 사람 스스로 만든 것이 없듯이, 즉 자신이 태어난 것 및 후세를 태어나게 할 것과 관련해서도 부모님이 존재를 하고 부모님이 되기도 할 것이지만 자신 스스로 만든 것은 아니듯이, 사람의 민족적인 인종적인 차이를 넘어서 사람이란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 지구상에 존재를 하는 동일한 인류의 범주에서 볼 때 수 천 년에 걸쳐서 수 많은 사람들의 각자의 개인으로서의 삶 및 사회적인 존재론적인 삶에 대한 기록들인 성경을 볼 때 비록 각자가 각자의 고유한 교통이나 대화나 동행이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와 없다고 하더라도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가 존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를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불어 우리 역사 속의 전설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할 때도 명확한, 그리고 근원적인, 개념적인 모습들이 없어서 그렇지 성경에서 말을 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사후 영혼의, 즉 살아서의 사람의 모습을 띈 영혼의, 세계가 존재를 하고 있는 것도 인지를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실존하는 존재이고 이 세상과 관련이 있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가질 없는, 특히 사람의 인지 능력의 특성에 의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와의 경험과 체험을 대변하는 성경에 대해서 사람의 근래의 지나친 학문적인, 이론적인, 논리적인, 또는 어휘 중심의 태도가 오히려 아주 간단한 보편적인 사실을 더욱 더 혼란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는 현상도 가끔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존재를 하는 존재, 영, I AM, Spirit으로, 표현이 되기도 하는 우주를 창조한 신 및 신의 세계에 대해서 기독교인이면 또는 성경을 알면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세계로, The World of Spirits as God and Angels로, 또는 하나님 여호와님 야훼님 여호와 하나님 천사님 그리스도 예수님 천지창조주님 주님 God Jehovah Yahweh The Lord God Angel Christ Jesus World-Creator Lord이란 말과 연관이 된 표현으로만 표현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근래의 지나친 어휘 중심의 태도를 일부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70824.
정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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